『구의산』은 1911년 6월 22일부터 9월 28일까지 ‘신안생(神眼生)’이라는 저자명 하에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1912년 상·하권으로 나누어 신구서림에서 발행한 소설이다. 당시 『매일신보』연재소설을 전담하고 있던 이해조는 이외에도 ‘선음자(善飮子)’·‘하관생(遐觀生)’ 등 다양한 필명을 활용한 바 있다. 『구의산』은 1910년대에만도 제 6판까지 발행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에는 제 9판까지 눈에 띈다. 비교적 널리 팔린 신소설 중 하나라 해야 할 것이다. “가정 정리상에 일대 호(好) 재료”가 될 것으로 예고된 이 소설은 범죄와 추리 서사를 얼개로 한다. 서울 박동 서판서 집이 주무대다. “병원에서는 생사람을 잡아서 피로는 옷에 물을 들이고 살은 말을 먹인다는 애매한 말이 성행”하던 무렵이라니까 아마 갑오개혁 이전, 상처한 서판서가 우연한 인연으로 재취하는 데서 소설은 시작한다. 후취로 들어온 이동집은 죽은 본처의 아들 오복을 자상하게 보살피고, 어느덧 15세가 된 오복은 아버지의 절친한 벗 김판서 집 딸과 혼약을 맺는다. 여기까지 평탄하게 전개되던 소설은 혼례 이튿날 오복이 목 잘린 시체로 발견되면서 급전한다. 당연히 신부 애중이 혐의를 받는 가운데, 그러나 사건은 제대로 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급히 마무리된다. 독자들에겐 이동집이 비복 칠성을 사주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밝혀둔 뒤다.
소설 후반부는 애중이 남복(男服)한 채 수사에 나서 범죄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이 얼개다. 서판서 집 인근에 머물면서 탐문을 벌인다는 극히 단순한 수사법이지만 마침 칠성어미를 만난 덕에 진상은 순조롭게 해명된다. 칠성은 달아난 뒤지만 이동집은 체포되고, 애중은 유복자 효손을 낳은 후 그를 훌륭하게 키운다. 서사가 또 한 차례 반전하는 것은 15세가 된 오복이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며 집을 나선 후다. 오복은 몇 달 후 전라도 어느 절에서 이동집 체포 후 집을 떠났던 할아버지 서판서와 재회한다. 조손(祖孫)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칠성을 발견, 관아에 신고해 대질 신문도 이루어진다. 그 와중에 15년 전 칠성이 오복을 죽이는 대신 불의(不義)의 남녀를 죽인 후 남자 쪽 시체를 목 잘라 오복과 바꿔치기했다는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시체가 발견되는 장면에 앞서 독자들에게 이동집의 음모를 미리 알려주었던 작가가 나머지 반쪽의 사실은 숨겨두었던 것이다. 시체가 목 잘려 있었다는 기괴한 사실 또한 이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납득을 얻는다. 이제야 밝혀지기로 칠성과 오복의 노주(奴主)는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가 배가 파선한 까닭에 무인도에 표류했다고 한다. 그 때 세계탐험 중이던 일본인 이학박사 등정(藤井), 즉 후지이에 의해 구조된 후 두 사람은 큐슈 후지이 박사의 집에 머물면서 각각 노동하고 학교 다니는 생활을 해 왔다는 것이다.
『구의산』은 결국 서판서와 오복, 효손의 3대가 재회하여 집안의 번영을 이루는 만족스런 장면으로 끝난다. 15년 동안 착한 어미로 위장했던 이동집이 오복의 혼례 당일 표변, 갑작스럽게 칠성에게 살인을 사주하는 등 서사적 합리성을 기준으로 하자면 불만스런 대목이 여럿 있지만 당시 독자들에게 이 점은 중요치 않았던 것 같다. 실상 『구의산』같은 ‘첫날 밤 신랑 피살담’은 근대 이전 서사 양식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화소(話素)다. 1910년대에만 6판을 넘길 수 있었던 『구의산』의 인기의 일단(一端)은 이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 처음 지적된 후 2000년대의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고찰된 바에 따르면 ‘첫날 밤 신랑 피살담’은 지금까지 수집된 구비 설화 중 20여 편에서 목격되는 화소로서, 근대 이전 소설류 중에서는 『조생원전』이나 『김씨열행록』에서 중요하게 채용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판본에 의하면 『조생원전』은 19세기 후반에 필사본으로, 『김씨열행록』은 1920년대에 활자본으로 유통된 것으로 보이는데, 『구의산』의 중요 화소, 즉 첫날 밤 신랑의 죽음과 신부에 의한 진상 규명은 이들 텍스트에 모두 공통되어 있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자면 『조생원전』이나 『김씨열행록』이 『구의산』보다 훨씬 앞선 소설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발견된 발행연대로는 『구의산』과 동시대적인 이들 텍스트가 과연 일방적으로 영향을 준 것인지, 아니면 『구의산』과 『조생원전』『김씨열행록』 사이에 훨씬 복잡한 상호관계를 가정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시대 배경이나 이념의 방향에 있어 『구의산』에서 이미 상당한 퇴행을 보인 신소설이 이후 시대를 거슬러 가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구의산』에 이어 『매일신보』에 연재된 『소양정』은 “조선 중고(中古)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천명한 바 있다. 『구의산』 후반부는 법정과 법관이 등장하는 등 근대적 자취가 분명하지만 “그때는 옛날이라”,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어두워서”라고 거듭 지칭되는 전반부는 이판서의 개화파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시간적이다. 특히 1920년대 활자본만이 남아 있는 『김씨열행록』에 대해 『구의산』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까닭 중 하나다. 1920년대에 창작된 단편소설마저 ‘신소설’이란 제목에 신소설풍 화려한 표지를 두르고 단행본으로 유통된 적이 있었을 정도이니 당시 출판시장은 결코 단순치 않다.
『구의산』 상권과 하권의 표지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지적해 두고자 한다. 고전소설로의 퇴행 직전인 전반부와 근대법의 체계로써 마무리되는 하반부의 차이 때문인지, 같은 해 발간되었음에도 상권과 하권 표지는 구도와 색채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다. 상권은 ‘구의산(九疑山)’이라는 제목대로 아홉 겹 산이 뒤두르고 있는 중에 서판서 일가인 듯한 네 명이 큰 기와집 앞에서 어울려 있는 장면인데 반해 하권은 법정 장면이다. 상권이 후일의 딱지본 고소설과도 어울림직한 표지라면 하권은 짙은 노란색이 강렬하고 원근법적 구도가 신기로운, 검은 제복의 법관 세 명이 권위적으로 배치된 표지다. 하권 표지에도 등장하는 서판서 일가를 그린 필치 자체는 비슷하지만 상권의 자연 풍경과 하권의 자 대고 그린 듯 직선적인 법정 구도는 인상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해제: 권보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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