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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잡지명)
  • 한글삼천리 7권 3호
  • 한문三千里 7卷 3號
  • 기타三千里 三月號
출판사
三千里社 삼천리사
발행지
京城 경성
창간일
1929년 6월 12일
간행일
1935년 3월
인쇄일
1935년
권호
7권 3호
간별
월간
형태
  • 면수288page

목차

삼천리 기밀실(三千里機密室)(The Korean Black Chamber)
사고(社告)
조선 민중의 지도자 총관(朝鮮 民衆의 指導者 總觀), 수십년래(數十年來) 반도강산(半島江山)에 금일(今日)가치 인재(人材) 모힌 적이 업다 _ 홍양명(洪陽明) 김경재(金璟載) 이종린(李鍾麟) 김창제(金昶濟) 김항규(金恒奎) 김병로(金炳魯) 주요한(朱耀翰) 홍증식(洪璔植) 이용설(李容卨) 서정희(徐廷禧) 김병선(金秉璿)
반도의 사상판검사진(半島의 思想判檢事陣), 고등(高等)·복심(覆審)·지방(地方)의 삼법원(三法院)을 통(通)하야 _ 김병로(金炳魯)
중화(中華) 사볫트수도(首都) 서금방기(瑞金放棄) 의의(意義), 전략적 전환(戰略的轉換)에 불과(不過) _ 창산학인(蒼山學人)
신설지국(新設支局)
21개조(個條)를 선언(宣言)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
커가는 천도교구파 세력(天道敎舊派勢力), 오영창파(吳榮昌派)와 합동구체화 _ 북릉학인(北陵學人)
최근 인물동정(最近人物動靜), 지엑고스로부아기아 대통령(大統領) 마사릿구
서백리아(西伯利亞)와 이동휘(李東輝) _ 권동진(權東鎭) 원세훈(元世勳) 홍양명(洪陽明)
창천(蒼天)이여 애아(愛兒)를 돌려주소서 _ 이광수(李光洙)
다녀간 애아(愛兒)여 _ 허영숙
사고(謝告) _ 삼천리사
제왕일대기(帝王一代記), 인조대왕편(仁祖大王篇), 다간전패(多艱顚沛)의 어우기(御宇期)와 영명(英明)하신 종종(種種)의 성덕(聖德) _ 목춘학인(木春學人)
동지(同志) 생각 _ 정칠성(丁七星)
청춘(靑春)을 앗기는 가인애사(佳人哀詞)
영고탑(寧古塔)과 동경성(東京城), 소연(騷然)한 북만주행(北滿洲行) _ 원세훈(元世勳)
한양(漢陽)·서울·경성(京城), 20년간(年間)의 변천(變遷)을 돌아보며 _ 유광열(柳光烈)
전기소설(傳記小說), 재계(財界)의 괴걸(怪傑) 박흥식(朴興植) _ 사층루거사(四層樓居士)
신촌(新村)동산에 난연(爛然)하게 핀 대이화(大梨花)의 푸로폣사들, 이화여교수진(梨花女敎授陣) _ 김팔련(金八蓮)
웅변가(雄辯家)의 연설(演說) _ 주운성(朱雲成)
미인박명애사(美人薄命哀史), 조서(早逝)한 문단(文壇)의 명화(名花) 송계월양(宋桂月孃) _ 홍의동자(紅衣童子)
악단시감(樂壇時感) _ 구왕삼(具王三)
신사숙녀신분조사서(紳士淑女身分調査書)
문사(文士)들의 양복(洋服), 구두, 모자(帽子)
고인고담(古人古談), 신인신담(新人新談), 야행구십리(夜行九十里)하든 명동촌 시대(明東村 時代)의 이동휘(李東輝)
선구자(先驅者)를 우러러, 위대(偉大)한 사상(史上)의 큰 어룬들 _ 안재홍(安在鴻), 설태희(薛泰熙), 이돈화(李敦化), 김창제(金昶濟), 신흥우(申興雨), 허헌(許憲), 정인과(鄭仁果), 여운형(呂運亨), 방응모(方應謨), 송진우(宋鎭禹), 차상찬(車相瓚), 이광수(李光洙), 박창훈(朴昌薰)
화신대화후 부흥기(和信大火后 復興記) _ 악양루(岳陽樓)
신여성과 애정과 정조관(新女性과 愛情과 貞操觀) _ 최정희(崔貞熙)
춘원연구(春園硏究)(5) _ 김동인(金東仁)
톨스토이 고향방문기(故鄕訪問記) _ 막사과대학(莫斯科大學) 최학성(崔學星)
명작선집(名作選集)에 대(對)하야
명작시가집(2)(名作詩歌集)(二)
쥐이야기 _ 민촌 이기영(民村 李箕永)
대도전(大盜傳) _ 윤백남(尹白南)
승방비곡(僧房悲曲) _ 최상덕(崔象德)
김강사(金講師)와 T교수(敎授) _ 유진오(兪鎭午)
홍수전후(洪水前後) _ 박화성(朴花城)
새뜻 _ 장혁주(張赫宙)
나무는 심어 놓고 _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돈(豚) _ 이효석(李孝石)
어미와 딸 _ 장덕조(張德祚)
노(老)총각 _ 방인근(方仁根)
상흔(傷痕) _ 한인택(韓仁澤)
3월호(三月號)를 내면서

해제

1929년에 취미와 시사 중심의 대중지 성격으로 발행한 교양 잡지. 편집인 겸 발행인은 김동환(金東煥)이며, 삼천리사(三千里社)에서 발행했다.
1929년 6월 창간되어 월간·격주간 등으로 B5판, B4판 또는 A5판으로 간행되다가, 『대동아(大東亞)』로 제명을 고쳐 1942년 3월과 7월 두 호를 더 내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취미 중심의 잡지였으나 저급한 취미로 타락하지는 않았으며, 주로 ‘고십난’에 치중해 호기심을 끌 만한 특종(特種)을 잘 포착해 지상(誌上)에 곧 반영시켰다.
우리 문학에 끼친 공로도 적지 않아서 문단의 중견작가 여럿이 집필한 「문예강좌」와 김동인(金東仁)의 「춘원연구(春園硏究)」, 여러 중견작가의 작품연대표 등은 특기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과장과 공상이 지나치고 제목에 비해 내용이 빈약한 것이 커다란 흠이며, 무엇보다도 그 친일적인 성격 때문에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초기는 민족적 입장에 섰으나 1937년 이후부터 점차 친일적인 경향으로 바뀌기 시작해, 마침내는 친일파 · 민족반역자를 등장시켜서 반민족적 잡지로 전락했고, 끝내는 친일 잡지 『대동아』로 개명까지 했다.(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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