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대중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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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삼천리 8권 11호
- 한문三千里 8卷 11號
- 기타三千里 十一月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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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인金裕觀
- 인쇄인 주소京城 林町 82番地
- 편집 겸 발행인金東煥
- 편집 겸 발행인 주소京城 鍾路 2丁目 91
- 출판사
- 三千里社 삼천리사
- 발행지
- 京城 鍾路 2丁目 91
- 인쇄소
- 鮮明印刷所 선명인쇄소
- 인쇄지
- 京城 林町 82番地
- 발매소
- 三千里社直營 삼천리사직영
- 창간일
- 1929년 6월 12일
- 간행일
- 1936년 11월 1일
- 인쇄일
- 1936년 10월 28일
- 권호
- 8권 11호
- 간별
- 월간
-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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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수250page
-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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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사진화보
삼천리특별시보(三千里特別時報)
사상범보호관찰법(思想犯保護觀察法), 육천팔백명(六千八百名)에 11월(十一月)부터 실시(實施) 총독부법무국(總督府法務局)의 입법내용(立法內容)은 여좌(如左)
동아일보(東亞日報) 발행정지표(發行停止表)
「비판(批判)」지(誌) 기사(記事)가 문제(問題), 주간(主幹) 송봉우(宋奉瑀氏) 피소(被訴)
중첩(重疊)한 반도언론계(半島言論界)의 불상사(不祥事), 동아일보 정간(東亞日報停刊) 중앙일보 휴간(中央日報休刊)
환영(歡迎)!! 청추시월(淸秋十月)에 손선수귀래(孫選手歸來)
신라제(新羅祭)
남신총독유고(南新總督諭告)
추야월(秋夜月)과 고향산천(故鄕山川)
장편작가회의(長篇作家會議)
김옥균씨(金玉均氏)의 최후(最後) _ 윤치호(尹致昊)
장덕수 인상(張德秀 印象), 그는 순정지인(純情之人) _ 유광열(柳光烈)
남대문 역두일기(南大門 驛頭日記), 재등전총독수기(齋藤前總督手記) _ 재등(齋藤) 전총독(前總督)
「조선평의회(朝鮮評議會)」 문제(問題),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에서 신총독(新總督)에게 요망(要望)
명배우(名俳優), 명감독(名監督)이 모여 「조선영화(朝鮮映畵)」를 말함
극동(極東) 제민족(諸民族)의 고민(苦悶), 서남파(西南派)의 몰락(沒落)과 중국(中國)의 통일문제(統一問題) _ 이우적(李友狄)
담화실
삼십년전(三十年前)의 청년연설객(靑年演說客)
송화강반(松花江畔)에서 _ 김경재(金璟載)
은행 주뇌자 인물평(銀行 主腦者 人物評) 동은취체역회장(東銀取締役會長) 민규식씨(閔奎植氏) _ 강촌학인(江村學人)
조만식씨 연설(曺晩植氏演說), 연제(演題) 「청년(靑年)과 사회봉사(社會奉事)」, 을해(乙亥) 9월 11일 송산교육회내(松山敎育會內)에서 고등농사학원사업(高等農事學院事業)에 대(對)한 강연 (講演)
인도양(印度洋)을 건느며 _ 김활란(金活蘭)
변혁후(變革後)의 동은 진로(東銀進路) _ 강촌학인(江村學人)
「극연(劇硏)」에서 희곡상제도(戱曲賞制度)를 창설(創設)
신석우씨(申錫雨氏) 업계획(業計劃)과 농장(農場) _ 일기자(一記者)
교조찬미(敎祖讚美)
스탄-벅 인상(印像), 세계적 거장(世界的 巨匠)과 조선영화인(朝鮮映畵人) 좌담회(座談會)
여류작가방문기(女流作家訪問記)(2), 정열(情熱)과 낭만(浪漫)속에 잠긴 이선희여사(李善熙女史)
문사극(文士劇)과 첫 무대(舞臺) _ 서항석(徐恒錫)
궁금한 그 사람 그 뒤
명가수(名歌手)를 엇더케 발견(發見)하엿든나
「춘향가(春香歌)」와 이동백(李東伯)」
여학생행장보고서(女學生行狀報告書)
삼천리 기밀실(三千里 機密室)
광고(廣告) - 유신론자냐 무신론자냐
나의 묘지명(墓地銘)
시경(詩經)(4) _ 안서(岸曙)
반려(伴侶)(제2회) _ 박영희(朴英熙)
그 처녀(處女)의 염서(艶書) _ 신정언(申鼎言)
편집후(編輯後)
해제
1929년에 취미와 시사 중심의 대중지 성격으로 발행한 교양 잡지. 편집인 겸 발행인은 김동환(金東煥)이며, 삼천리사(三千里社)에서 발행했다.
1929년 6월 창간되어 월간·격주간 등으로 B5판, B4판 또는 A5판으로 간행되다가, 『대동아(大東亞)』로 제명을 고쳐 1942년 3월과 7월 두 호를 더 내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취미 중심의 잡지였으나 저급한 취미로 타락하지는 않았으며, 주로 ‘고십난’에 치중해 호기심을 끌 만한 특종(特種)을 잘 포착해 지상(誌上)에 곧 반영시켰다.
우리 문학에 끼친 공로도 적지 않아서 문단의 중견작가 여럿이 집필한 「문예강좌」와 김동인(金東仁)의 「춘원연구(春園硏究)」, 여러 중견작가의 작품연대표 등은 특기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과장과 공상이 지나치고 제목에 비해 내용이 빈약한 것이 커다란 흠이며, 무엇보다도 그 친일적인 성격 때문에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초기는 민족적 입장에 섰으나 1937년 이후부터 점차 친일적인 경향으로 바뀌기 시작해, 마침내는 친일파 · 민족반역자를 등장시켜서 반민족적 잡지로 전락했고, 끝내는 친일 잡지 『대동아』로 개명까지 했다.(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