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대중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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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삼천리 8권 12호
- 한문三千里 8卷 12號
- 기타三千里 十二月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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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인徐成洙
- 인쇄인 주소京城府 林町 82
- 편집 겸 발행인金東煥
- 편집 겸 발행인 주소京城府 鍾路 2의 91
- 출판사
- 三千里社 삼천리사
- 발행지
- 京城府 鍾路 2의 91
- 인쇄소
- 鮮明印刷所 선명인쇄소
- 인쇄지
- 京城府 林町 82
- 발매소
- 三千里社直轄 삼천리사직할
- 창간일
- 1929년 6월 12일
- 간행일
- 1936년 12월 1일
- 인쇄일
- 1936년 11월 28일
- 권호
- 8권 12호
- 간별
- 월간
-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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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수250page
- 가격
-
- 기타送料2
목차
양대신문특보(兩大新聞特報)
발동(發動)하는 사상범 관찰법(思想犯 觀察法)(일독협정(日獨協定)으로 더욱 강화?)
삼천리기밀실(三千里機密室), 장안갑부 추수 조사(長安甲富 秋收 調査)
강남풍월(江南風月)
극동(極東)서 활약(活躍)하는 군사령관(軍司令官) 총독대공사(總督大公使)
안도산(安島山)과의 문답(問答) 4개조(四個條)
강남풍월(江南風月)
상해(上海)·남경(南京)·북경(北京)·회상(回想) _ 여운홍(呂運弘), 이광수(李光洙)
강남풍월(江南風月)
우익진영(右翼陣營), 좌익진영(左翼陣營)(1) 「조선인징병(朝鮮人徵兵)」 등(等)을 어(語)하는 시중회 수령(時中會 首領) 최린씨(崔麟氏)
조흔일에 애쓰는 큰 사람들(1), 교육(敎育)에 삼십만원(參拾萬圓) 내놋는 김홍량씨(金鴻亮氏)
끽다점 연애풍경(喫茶店 戀愛風景)
최근(最近) 매약전(賣藥戰), 누구누구가 돈 모앗나?
채근담강의(菜根譚講義) _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자유주의의 부흥(自由主義의 復興) _ 홍양명(洪陽明)
서울푸레쓰 해부(解剖)
낙천가구락부(樂天家俱樂部)
나의 참회록(懺悔錄) _ 백용성(白龍城)
호한민(胡漢民) 생각 _ 주요한(朱耀翰)
감사(感謝)와 사죄(謝罪) _ 이광수(李光洙)
예술가(藝術家)의 쌍곡주(雙曲奏), 문사(文士) 장혁주씨(張赫宙氏)와 무용가(舞踊家) 최승희여사 (崔承喜女史), 장소(場所) 동경(東京)에서
신경유감(新京有感) _ 김경재(金璟載)
임오군란 회상기(壬午軍亂 回想記) _ 차상찬(車相瓚)
불교문학(佛敎文學)에 나타난 금욕생활(禁欲生活) _ 김태흡(金泰洽)
2·26과 60만원(六十萬圓), 기미(期米)로 일조성공(一朝成功)
비밀결사(秘密結社) 「청방(靑帮)」, 일천명(一千名)의 세력(勢力)을 가지고 상해(上海)에 근거(根據)두어 _ 산서 태원(山西 太原)에서 김대일(金大馹)
일탐사형사건(日探死刑事件), 해삼위(海參威)에서 이러난 스파이와 미희(美姬)
「화신(和信)」과 일전(一戰)하랴는 「동양백화(東洋百貨)」 연맹(聯盟)의 책전(策戰)
명창(名唱)과 명가곡(名歌曲), 심청가(沈淸歌)와 「송만갑(宋萬甲)」
육군성(陸軍省)팜푸렛트, 소련극동군비(蘇聯極東軍備)와 중국군비(中國軍備)
정조유린(貞操蹂躪)의 적위료(籍慰料)? _ 호변사(護辯士) 양윤식(楊潤植)
마음의 달 _ 이서구(李瑞求)
하리웃드에서
나의 분격(憤激) _ 김말봉(金末峰)
로서아(露西亞)로 가려다가 _ 최승희(崔承喜)
「예술(藝術)」이냐 「사(死)」냐, 문사심경(文士心境)
승(僧)이 되고 십지안흔가, 문사심경(文士心境)
연애(戀愛)냐 돈이냐, 문사심경(文士心境)
다시 젊어지고 십흔가, 문사심경(文士心境)
고전문학(古典文學)의 감상(鑑賞)과 연구(硏究),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의 연구(硏究) _ 김태준(金台俊)
고전문학(古典文學)의 감상(鑑賞)과 연구(硏究), 구운몽(九雲夢)의 가치(價値) _ 양백화(梁白華)
나의 유언장(遺言狀) _ 로신(魯迅)
시경(詩經)(5) _ 안서(岸曙) 역(譯)
이 작품 추천이유(作品推薦理由) _ 이효석(李孝石)
더벙타리 _ 한적선(韓笛仙)
현숙(玄淑) _ 나혜석(羅蕙錫)
독자제현(讀者諸賢)에 보내는 편지(便紙)
해제
1929년에 취미와 시사 중심의 대중지 성격으로 발행한 교양 잡지. 편집인 겸 발행인은 김동환(金東煥)이며, 삼천리사(三千里社)에서 발행했다.
1929년 6월 창간되어 월간·격주간 등으로 B5판, B4판 또는 A5판으로 간행되다가, 『대동아(大東亞)』로 제명을 고쳐 1942년 3월과 7월 두 호를 더 내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취미 중심의 잡지였으나 저급한 취미로 타락하지는 않았으며, 주로 ‘고십난’에 치중해 호기심을 끌 만한 특종(特種)을 잘 포착해 지상(誌上)에 곧 반영시켰다.
우리 문학에 끼친 공로도 적지 않아서 문단의 중견작가 여럿이 집필한 「문예강좌」와 김동인(金東仁)의 「춘원연구(春園硏究)」, 여러 중견작가의 작품연대표 등은 특기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과장과 공상이 지나치고 제목에 비해 내용이 빈약한 것이 커다란 흠이며, 무엇보다도 그 친일적인 성격 때문에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초기는 민족적 입장에 섰으나 1937년 이후부터 점차 친일적인 경향으로 바뀌기 시작해, 마침내는 친일파 · 민족반역자를 등장시켜서 반민족적 잡지로 전락했고, 끝내는 친일 잡지 『대동아』로 개명까지 했다.(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