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교육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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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태극학보 2호
- 한문太極學報 2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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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인김지간
- 인쇄인 주소東京市 本鄕區 元町 2丁目 66番地 太極學會 內
- 편집 겸 발행인장응진
- 편집 겸 발행인 주소東京市 本鄕區 元町 2丁目 66番地 太極學會 內
- 출판사
- 太極學會 태극학회
- 발행지
- 東京市 本鄕區 元町 2丁目 66番地
- 인쇄소
- 敎文館印刷所 교문관인쇄소
- 인쇄지
- 東京市 京橋區 銀座 4丁目 1番地
- 창간일
- 1906년 8월 24일
- 간행일
- 1906년 9월 24일
- 인쇄일
- 1906년
- 통권
- 2호
- 간별
- 월간
- 형태
-
- 면수62page
-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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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태극학회 총설 중(太極學會總說 中) _ 유학생 감독 한치유(留學生監督 韓致愈)
근하 태극학보 창시(謹賀太極學報創始 _ 동경 장택계길(東京 長澤啓佶)
국제교제론(國際交際論) _ 회원 최석하(會員 崔錫夏)
가정교육(家庭敎育) _ 회원 장계택(會員 張啓澤)
헌신적 정신(기서)(전호속)(獻身的 精神(寄書)(前號續)) _ 대몽생 최남선(大夢生 崔南善)
종교 유지 방침이 재경학가 속선개화(기서)(전호속)(宗敎維持方針이 在經學家速先開化(寄書)(前號續) _ 인고생 류승흠(麟皐生 柳承欽)
고 아이천만 동포(기서)(전호속)(告我二千萬同胞(寄書)(前號續) _ 공학사 상호(工學士 尙灝)
인생의 의무(人生의 義務) _ 편집인 장응진(編輯人 張膺震)
정치가의 품위(政治家의 品位) _ 회원 김지간(會員 金志侃)
학술상 관찰로 상업경제의 공황상태를 론홈(學術上 觀察로 商業經濟의 恐慌狀態를 論홈) _ 회원 전영작(會員 全永爵)
화산설(火山說) _ 편집인 장응진(編輯人 張膺震)
공기설(전호속)(空氣說(續前號)) _ 편집인 장응진(編輯人 張膺震)
수증기의 변화(전호속)(水蒸氣의 變化(前號續)) _ 회원 김지간(會員 金志侃)
미균론(黴菌論) _ 회원 김진초(會員 金鎭初)
기르 방법 _ 회원 김낙영(會員 金洛泳)
본국 졔형 졔의게(寄書) _ 녀사 윤정원(윤뎡원)(女史 尹貞媛)
음료수(기서)(飮料水(寄書)) _ 유전(劉銓)
위생(전호속)(기서)(衛生(前號續)(寄書)) _ 강병옥(康秉鈺)
구급치료법(救急治療法) _ 회원 박제봉(會員 朴濟鳳)
염(鹽) _ 회원 홍정구(會員 洪正求)
성공설과 실패주의(기서)(成功說과 失敗主義(寄書)) _ 우고생 최린(友古生 崔麟)
아국의 실업관(기서)(我國의 實業觀(寄書)) _ 장홍식(張弘植)
해수욕의 일일(海水浴의 一日) _ 백악생(白岳生)
태극학회창립기념회(太極學會創立紀念會)
이갑씨 기함(李甲氏 寄函)
회원 소식(會員消息)
잡조(雜俎)
본회 회원명록(本會會員名錄)
태극학보 의연금 씨명(太極學報義捐金氏名)
해제
태극학회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다시 국내의 계몽운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09년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통합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1906년 8월 조직이 정비되어 학회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를 창간했다. 『태극학보』는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되었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1907년 3월 학보편찬원 8인을 신설해 학보 발간에 주력했다.
『태극학보』는 1906년 8월 24일 제1호를 창간한 이래 매년 8월을 제외하고 1908년 12월까지 27호를 발간했다. 학보의 크기는 A5판, 분량은 52∼72면 정도였다. 처음에는 1,000부를 발행했으나 호응이 커서 2,000부까지 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학보』는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태극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그러나 발행 장소가 일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사는 일체 싣지 못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