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교육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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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태극학보 10호
- 한문太極學報 10號
- 발행자
-
- 인쇄인김지간
- 인쇄인 주소東京市 本鄕區 元町 2丁目 66番地 太極學會 內
- 편집 겸 발행인장응진
- 편집 겸 발행인 주소東京市 本鄕區 元町 2丁目 66番地 太極學會 內
- 출판사
- 太極學會 태극학회
- 발행지
- 東京市 本鄕區 元町 2丁目 66番地
- 인쇄소
- 敎文館印刷所 교문관인쇄소
- 인쇄지
- 東京市 京橋區 銀座 4丁目 1番地
- 창간일
- 1906년 8월 24일
- 간행일
- 1907년 6월 3일
- 인쇄일
- 1907년 5월 27일
- 통권
- 10호
- 간별
- 월간
-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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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수60page
-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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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인도에 기독교 세력(印度에 基督敎 勢力) _ 인도국 신사 쓰씨(印度國 紳士 쓰氏) 본국 신사 윤치호씨 번역(本國 紳士 尹致昊氏 繙譯) 백악자 필기(白岳子 筆記)
수신의 필요(修身의 必要) _ 미국 에일대학교 학사(美國 에일大學校 學士) 인도 순행 총무 에듸 쉬우쓰씨(印度巡行總務 에듸 쉬우쓰氏) 김규식씨 번역(金奎植氏 翻譯) 백악자 필기(白岳子 筆記)
습관개량론(習慣改良論)
한국 흥복은 영웅 숭배에 재(韓國興復은 英雄崇拜에 在) _ 우양 최석하(友洋 崔錫夏)
교육의 목적(敎育의 目的) _ 우경명 역(禹敬命 譯)
화성돈의 일상생활 좌우명(8호 속)(華盛頓의 日常生活 座右銘 八號 續) _ 이훈영(李勳榮)
입법 사법 급 행정의 구별과 의의 8호속(立法 司法 及 行政의 區別과 意義 八號續) _ 김영작(金永爵)
동서 양양인의 수학사상(東西 兩洋人의 數學思想) _ 김낙영 역술(金洛泳 譯述)
교육이 불명이면 생존을 부득(敎育이 不明이면 生存을 不得) _ 박상용(朴庠鎔)
역사담 제8회(歷史譚 第八回) _ 박용희(朴容喜)
지나 지리(속)(支那地理(續) _ 한명수(韓明洙)
심장운동과 혈액순환의 요론(心臟運動과 血液循環의 要論) _ 이규영(李奎濚)
동물체에 유 세력의 근원(動物體에 有 勢力의 根源) _ 박상락 역(朴相洛 譯)
양돈설 (9호속)(養豚說 九號續) _ 김진초(金鎭初)
의뢰고 사 거시 독립고 죽 것만 갓지 못 _ 박윤철(朴允喆)
학창야우우상교우감화(學窓夜雨偶想交友感化) _ 석소 이동초(石蘇 李東初)
애국가(愛國歌) _ 이원익(李源益)
춘일산보음(春日散步吟) _ 국암 이규영(菊庵 李奎濚)
야관상야박람회(夜觀上野博覽會) _ 난곡 이희(蘭谷 李熙)
영춘(詠春) _ 우송 정인하(又松 鄭寅河)
해저여행 기담 제3회(海底旅行奇譚 第三回) _ 박용희(朴容喜)
안창호씨의 인격(安昌浩氏의 人格) _ 월단생(月旦生)
잡보(雜報)
해제
태극학회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다시 국내의 계몽운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09년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통합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1906년 8월 조직이 정비되어 학회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를 창간했다. 『태극학보』는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되었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1907년 3월 학보편찬원 8인을 신설해 학보 발간에 주력했다.
『태극학보』는 1906년 8월 24일 제1호를 창간한 이래 매년 8월을 제외하고 1908년 12월까지 27호를 발간했다. 학보의 크기는 A5판, 분량은 52∼72면 정도였다. 처음에는 1,000부를 발행했으나 호응이 커서 2,000부까지 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학보』는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태극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그러나 발행 장소가 일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사는 일체 싣지 못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