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교육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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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태극학보 22호
- 한문太極學報 22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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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인김지간
- 인쇄인 주소東京 芝區 白金三光町 273番地
- 편집 겸 발행인김낙영
- 편집 겸 발행인 주소東京 芝區 白金三光町 273番地
- 출판사
- 太極學會 태극학회
- 발행지
- 東京 芝區 白金三光町 273番地
- 인쇄소
- 明文舍
- 인쇄지
- 東京 牛込區 辨天町 26番地
- 창간일
- 1906년 8월 24일
- 간행일
- 1908년 6월 24일
- 인쇄일
- 1908년 6월 20일
- 통권
- 22호
- 간별
- 월간
- 형태
-
- 면수62page
-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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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보의 과거 급 미래(本報의 過去 及 未來)
결심의 능력(決心의 能力) _ 김지간(金志侃)
법률학생계의 관념(法律學生界의 觀念) _ 송남(松南)
우리 부로여(우리 父老여) _ 호연자(浩然子)
유대분발민족연후 유대사업영웅(有大奮發民族然後 有大事業英雄) _ 중수(中叟)
수구가 반유어취신(守舊가 反愈於就新) _ 양치중(楊致中)
세계문명사(世界文明史) _ 초해 역술(椒海 譯述)
역사담 제20회(歷史譚 第二十回) _ 숭고생(崇古生)
아동교육설(兒童敎育說) _ 연구생(硏究生)
경쟁의 근본(競爭의 根本) _ 포우생(抱宇生)
가정교육법(家庭敎育法) _ 김수철 역술(金壽哲 譯述)
철학초보(哲學初步) _ 학해주인(學海主人)
동물의 생식법(動物의 生殖法) _ 포우생(抱宇生)
과수전정법(전호속)(果樹剪定法(前號續)) _ 김지간(金志侃)
위생문답(衛生問答) _ 김영재(金英哉)
화학초보(化學初步) _ 박정의(朴廷義)
송 유학생 귀국(送留學生歸國) _ 송남(松南)
송 농학사 김진초씨 지본국(送農學士金鎭初氏之本國) _ 김원극(金源極)
시일야에 만심흥감(是日也에 滿心興感) _ ꜐단산인(꜐丹山人)
이어(俚語) _ 십륙세 달관인 박섬균(十六歲 達觀人 朴㣣均)
유상야공원(遊上野公園) _ 송남 춘몽인(松南 春夢人)
관동물원(觀動物園) _ 송남 춘몽인(松南 春夢人)
시감(時感) _ 중수(中叟)
시감(時感) _ 장림만오(長林晩悟)
임불인지(臨不忍池) _ 쌍성초부(雙城樵夫)
축태극학회(祝太極學會) _ 석상은인(石上隱人)
축태극학회(祝太極學會) _ 영명거사(永明居士)
송김진초(농학졸업생)(送金鎭初(農學卒業生)) _ 두남일인(斗南一人)
송김진초(농학졸업생)(送金鎭初(農學卒業生)) _ ꜐단산인(꜐丹山人)
위?단산인생조운(慰?丹山人生朝韻) _ 송남춘몽인(松南春夢人)
잡록(雜錄)
해제
태극학회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다시 국내의 계몽운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09년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통합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1906년 8월 조직이 정비되어 학회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를 창간했다. 『태극학보』는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되었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1907년 3월 학보편찬원 8인을 신설해 학보 발간에 주력했다.
『태극학보』는 1906년 8월 24일 제1호를 창간한 이래 매년 8월을 제외하고 1908년 12월까지 27호를 발간했다. 학보의 크기는 A5판, 분량은 52∼72면 정도였다. 처음에는 1,000부를 발행했으나 호응이 커서 2,000부까지 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학보』는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태극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그러나 발행 장소가 일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사는 일체 싣지 못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