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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잡지 > 교육
제호(잡지명)
  • 한글태극학보 26호
  • 한문太極學報 26號
발행자
  • 인쇄인김지간
  • 인쇄인 주소東京 芝區 白金三光町 273番地
  • 편집 겸 발행인김낙영
  • 편집 겸 발행인 주소東京 芝區 白金三光町 273番地
출판사
太極學會 태극학회
발행지
東京 芝區 白金三光町 273番地
인쇄소
明文舍
인쇄지
東京 牛込區 辨天町 26番地
창간일
1906년 8월 24일
간행일
1908년 11월 24일
인쇄일
1908년 11월 20일
통권
26호
간별
월간
형태
  • 면수66page
가격

표지화 (삽화,컷)

목차

내지 각 학회의 대 의견(內地 各 學會의 對 意見) _ 기자(記者)
하기에 귀국엿든 유학생 제씨여(夏期에 歸國엿든 留學生 諸氏여) _ 김기주(金基柱)
아국 학생 제씨여(我國學生諸氏여) _ 송남(松南)
사범 양성의 필요(師範養成의 必要) _ 추성자(秋醒子)
장로의 책임(長老의 責任) _ 관해객(觀海客)
학교의 폐해(學校의 弊害) _ 영흥지회원(永興支會員) 계봉우(桂奉瑀)
선각자의 삼소주의(先覺者의 三小注意) _ 성천지회장(成川支會長) 박상준(朴相駿)
아국 청년의 위기(속)(我國靑年의 危機(續)) _ 문일평(文一平)
가정교육법(속)(家庭敎育法(續) _ 김수철 역술(金壽哲 譯述)
동몽물리학 강화(童蒙物理學 講話) _ NYK생(生)
뇌와 신경의 건전법(腦와 神經의 健全法) _ 연구생(硏究生)
계병 간역치료법(鷄病 簡易治療法) _ 학해주인(學海主人)
리수재배설 전24호속(梨樹栽培說 前二十四號續) _ 김지간(金志侃)
송 정익로씨 귀국(送鄭益魯氏 歸國) _ 송남자(松南子)
송 곽용순군 귀국(送郭龍舜君 歸國) _ ꜐단산인(꜐丹山人)
독립의 필재어단결(獨立의 必在於團結) _ 박일찬(朴日燦)
고 아 동포 제군(告我同胞諸君) _ 서병현(徐炳玹)
공함(公函) _ 장기흡(張箕洽)
경정 태극학회 첨좌(敬呈太極學會 僉座) _ 박재선(朴載善)
공정우 태극학보 주필 김원극 각하(恭呈于太極學報 主筆 金源極 閣下) _ 이달현(李達鉉) 강념백(姜念伯) 홍재헌(洪在憲)
혈루(희랍인 스팔타쿠스의 연설)(血淚(希臘人 스팔타쿠스의 演說) _ 이보경(李寳鏡)
봉정 태극학회 첨좌하(奉呈太極學會 僉座下) _ 김하변(金夏變)
기운(寄韻) _ 호암 최제극(湖庵 崔齊極)
화(和) _ 송남 김원극(松南 金源極)
출품천영정강려행 ꜐단산인(出品川迎靜岡旅行 ꜐丹山人) _ 추성자(秋醒子)
위한동초호진운(慰韓東初弧辰韻) _ 송남자(松南子)
희망가(希望歌) _ 애국생(愛國生)
학생가(學生歌) _ 교육자(敎育子)
잡록(雜錄)

해제

태극학회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다시 국내의 계몽운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09년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통합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1906년 8월 조직이 정비되어 학회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를 창간했다. 『태극학보』는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되었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1907년 3월 학보편찬원 8인을 신설해 학보 발간에 주력했다.
『태극학보』는 1906년 8월 24일 제1호를 창간한 이래 매년 8월을 제외하고 1908년 12월까지 27호를 발간했다. 학보의 크기는 A5판, 분량은 52∼72면 정도였다. 처음에는 1,000부를 발행했으나 호응이 커서 2,000부까지 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학보』는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태극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그러나 발행 장소가 일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사는 일체 싣지 못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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