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 구분
- 단행본 > 문학 > 신소설
-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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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혈의루
- 한문血淚
-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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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李人稙 이인직
- 출판사
- 광학셔포 광학서포
- 발행지
- 경성
- 발행일
- 1908년
- 형태
-
- 세로22cm
- 면수94page
해제
『혈의루』는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에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50회에 걸쳐 연재된 소설이다. ‘국초(菊初)’라는 서명 하 ‘소설’이라는 표제로 연재되었으며,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후 한자 옆에는 작은 한글 활자를 달아 음독 혹은 훈독하는 독특한 표기 방법이 쓰였다. 예컨대 ‘一婦人이 年히’라고 써 놓은 후 ‘일부인’에 ‘婦人’이라고 해 훈독과 음독을 병행하고, ‘年’에 ‘나’를 붙여 훈독한 후 ‘나히’로 읽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 독특한 방법은 이능화 등에 의해서도 주창된 바 있고 한 때 ‘아속공독체(雅俗共讀體)’라는 명칭을 부여받기도 했다. 한자가 편한 사람은 한자대로, 한글이 나은 사람은 한글 표기대로 읽을 수 있게 한다는 취지였다. 근대 일본어 표기법을 준용한 것이기도 하다. 『만세보』에서는 창간 초기 이 표기법을 널리 실험했다. 그러나 연재가 거듭될수록 『혈의루』의 표기는 순한글로 수렴,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는 띄어쓰기한 순한글 표기를 채택하게 된다.
이번에 복각본 저본으로 삼은 『혈의루』는 광학서포에서 1908년에 간행된 제2판이다. 1907년 3월에 발행되었다는 『혈의루』 초판은 아직까지 발굴된 바 없으니 지금으로선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연재 당시와 달리 ‘신소설’이란 표현을 도드라지게 앞세우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혈의루』는 청일전쟁 당시 부모와 헤어진 옥련이라는 일곱 살 소녀의 성장담을 기본 서사로 한다. 이노우에(井上)라는 일본인 군의관에게 구조된 옥련은 부모의 생사를 확인할 길 없는 상황에서 이노우에의 양녀가 되어 일본에 가고, 이후 미국으로까지 진출해 신식 교육을 받는다. 이런 줄기에 이노우에 소좌가 전사한 이후 신데렐라풍 양어머니의 박대와 구원자라 할 청년 구완서와의 결연담이 곁들여져 옥련의 서사를 풍성하게 해 준다.
신소설 양식의 특징 선구적으로 보여줘
최초의 신소설이라 일컬어야 할 『혈의루』는 신소설 양식의 특징적 면모를 선구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젊은 여성이고, 주인공이 집밖에 나선 후 수난과 교육의 내력이 서사의 줄기이며, 걸맞은 배우자와의 결연이 결말이다. 청일전쟁을 서사의 출발점으로 하고 1902년의 시점에서 마무리된다는 것도 신소설 공통의 시간적 배경과 겹친다. 대부분의 신소설이 1894~1905년이라는 시기를 상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기는 청일전쟁 이후 중국의 간섭이 사라지고 열강 개입에 의해 일본의 주도권 또한 후퇴한 시기, 즉 일종의 세력 균형 속에서 조선이 자주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1890년대 말 황제와 민간의 충돌 이후 그 가능성은 곧 냉각되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는 보호국 체제 하의 1905~1910년과 달리 자주와 개혁에의 믿음이 현실성을 갖고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소설은 1894~1905년이라는 시기를 현재로 의제화하는 대신 미래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취급한다. 『혈의루』가 아직 젊은 옥련의 아버지 김관일 대신 옥련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데서부터 그 사실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황제와 민간 정치단체, 친러와 친일과 친미 등이 복잡하게 교착돼 있던 1894~1905년의 정치·사회 지형이 직접 문제되는 일은 거의 없다. 김관일은 실상 옥련에 앞서 미국 유학을 가 있지만 그 성장은 더디며, 어린 시절 딸처럼 총명했던 옥련의 어머니 최춘애는 홀로 고향집을 지켜야 할 책무를 다할 뿐이다. 미래는 소설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아직 15세에 불과한 옥련에게 넘겨진다.
『혈의루』는 단행본 발간 당시 “평양성중에 옥련이라는 김씨 여아가 무한한 곤란을 경(經)하고 외국에 유리하며 유학한 실사(實事)”를 바탕으로 했다는 선전을 앞세운 바 있다. 실제 사건에 기반했으니 허무맹랑한 잡설(雜說)이 아니라는 신소설의 방어 전략을 보여준 효시 격인 셈이다. 그러한 현실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혈의루』는 늘 일본으로부터의 오염을 의심받는 텍스트다. 『혈의루』가 번안작일 가능성은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인직이 유학하고 있을 당시 일본에서는 ‘혈의루’가 일종의 관용어로서 이를 제목으로 채용한 책만도 10종 가까이 간행되었으며, 신문 연재 당시 표기법부터 일본의 영향이 짙다는 점이 일차적 사유다. 저자 이인직이 이완용의 비서로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막후에서 보조했다는 사실 또한 『혈의루』가 일본 텍스트의 번안이라는 설을 심리적으로 지지하기 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유행어 빌려 조선의 현실을 그리다
『혈의루』의 번안 여부는 앞으로 더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한국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모방과 혼성이 근대 초기 문학의 일반적 관성이었음을 생각하면 『혈의루』에 번역 혹은 번안이라는 사정이 부분적으로 개입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지금까지 그 유사성이 가장 빈번하게 지적된 텍스트는 1905년 간행된 무라카미 고사이(村上弘齋)의 『혈의루』로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러일전쟁에서 전사한 후 집안에서 고립에 시달리다 러시아로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10년대 초반 ‘혈의루’라는 동명(同名)의 표제 하에 서울에서 공연된 연극 역시 무라카미 고사이 소설에 토대를 둔 레퍼토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에 전래되었고 서사 골격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 관계는 더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서사에서 다소의 일치점이 보일지언정 이인직의 『혈의루』와 무라카미 고사이의 『혈의루』는 차이가 많은 소설이다. 번역․번안에 대한 심리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인직 소설 중 해외 원천이 확인된 소작(所作)은 아직 없다. ‘혈의루’가 널리 쓰인 유행어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인직이 그런 언어 관습을 빌려왔다는 정도로 생각해 두는 편이 지금으로선 온당하겠다. 『혈의루』가 연재될 무렵 ‘혈루(血淚)’ 즉 피눈물은 조선에서도 유행어가 되어 있었으며, 이인직은 그 표제 하에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까지의 조선의 현실을 다루어 냈다. 부유한 평민 혹은 중인층 집안의 딸이 외국 유학을 마치고 지도자가 되어 귀국한다는 『혈의루』의 서사는 그 시절 성과 지역과 계급을 둘러싼 욕망의 한켠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혈의루』의 배경이 되는 1894~1902년의 시기에 작가 이인직은 일본 유학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혈의루』가 순수한 창작이라고 해도 그 현실성을 꼼꼼히 검토해 봐야 할 이유는 또 그것대로 있다. 최근에는 당시 종군기자로 청일전쟁을 취재했던 일본인 동료가 준 정보가 『혈의루』의 뿌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되어 있는 상태다. 『혈의루』는 충분히 유명하지만 밝혀야 할 점은 아직 많다. 더 확대시켜 보자면 신소설 양식 일반이 그렇다. 지금도 『혈의루』와 신소설은 재조명을 기다리는 중이다.(해제: 권보드래)